요한계시록강해-9 / 막연하게 드렸던 기도

▷ 본문 :요한계시록 8장 1절 - 13절
▷ 설교자 :전근일 담임목사
▷ 설교일 :2013년 2월 10일 주일

일본의 작가인 엔도 슈사꾸라는 사람이 지은 ?침묵?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젊은 세바스찬 로드리고 신부가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에 선교 활동을 하다가 배교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때 스승이 배교 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젊은 신부가 몰래 일본으로 잠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본에 몰래 잠입했던 것이 결국은 발각 이 되어서 심문을 받게 되는데, 그 체포되어 심문 받는 가운데 스승을 만나 게 됩니다. 그는 혈기를 내면서 스승에게 질문을 합니다. “스승님, 왜 배교 하였습니까?” 그때에 페레이라 신부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끓는 기름 가마 속에서 성도들의 비명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나는 성도들과 밤이 맞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와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그래서 나는 죄 없는 성도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배교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젊은 신부는 자기도 스승과 같이 배교를 하게 됩니다. 그 배교하는 의식은 예수님의 초상화가 그려진 성화를 발로 밟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젊은 신부는 눈물을 머금고 예수님의 초상화를 발로 밟고 지나갑니다. 그때 주님 의 음성이 들립니다. “나를 밟고 지나가라.” 이때 젊은 신부가 소리칩니다. “주님 어찌하여 우리의 고통에 침묵하셨습니까? 성도들이 기름 가마 곁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예수님은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절규하는 항변의 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을 하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까? 가만히 계신다고 생각이 들 때가 없었습니까? 나를 모함하는 사람은 승승장구하는데, 아무런 잘못이 없는 나는 언제나 패배하고, 고통하고, 어려운 삶의 길을 걸어갔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세속적인 방법으로, 불의한 방법으로, 잘못된 방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성공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닐까?’ 가끔 우리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침묵의 순간이 나타납니다. 1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간쯤 고요하더니라고 기록합니다. 이러한 침묵은 바로 일곱째 인을 뗄 때 나타난 현상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우리는 일곱 가지 인중에 여섯 가지의 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보문에 드디어 일곱 번째 인이 떼어지는데 일곱 번째 인을 뗄 때에는 직접적 재앙이 나타나지 않고 일곱 나팔의 재앙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일곱 인의 재앙과 일곱 나팔의 재앙은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곱 인의 재앙과 일곱 나팔의 재앙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곱 나팔의 재앙들은 일곱 인의 재앙보다 심판의 정도가 더 격렬하고 광범위합니다. 그리고 두 재앙 사이에 순서와 내용상 차이점이 많으며 또한 여섯째 인의 재앙까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데 반해 일곱 나팔의 재앙은 인침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곱 번째 인을 떼고 난 다음에 하늘이 반시간쯤 고요했습니다. 여기에 많은 학자들이 주목합니다. 과연 반시쯤의 고요함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를 놓고 여러 가지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대략 여섯 가지의 견해가 있는데 첫째, 성도들이 누릴 영생의 평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빅토리누스라는 학자는 반시는 영원한 안식의 시작이다.”라고 했습니다. 둘째, 이어질 나팔 재앙의 두려움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장차 벌어질 일들에 대한 긴장감이 고조됨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계시가 잠깐 중단된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일곱 인의 재앙에서 일곱 나팔의 재앙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잠깐 동안 하나님의 계시가 중단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넷째, 성도들의 기도를 위한 정숙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성도들의 기도의 향연이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라가도록 하늘의 찬양대들조차 엄숙하게 침묵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다섯째, 이 세상 종말을 앞두고 일어날 긴장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마치 죄인이 긴장 속에서 배심원들의 판결을 기다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여섯째,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 있는 의인 100보다 더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주장 가운데 저는 하늘이 반시(半時) 동안쯤 고요하더니라는 말씀을 세 가지 면으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 이어질 재앙의 참혹함에 대한 침묵, 둘째, 성도들의 기도의 향연을 들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침묵, 셋째,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침묵 이 세 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기록한 책이라, 그리고 소망의 책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주 배웠던 144,000명에 대해서 이단들은 이 숫자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때 두려움을 조장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따르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모두가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처럼 우리 모두가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반시 동안의 침묵은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성도들의 기도소리를 들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침묵이며 아울러 죄인들이 구원을 회개하여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도록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침묵인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나팔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의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팔을 불 때마다 이 땅에 재앙이 시작이 되어집니다. 그런데 재앙이 바로 시작되지 않고 3-4절의 말씀을 보면 성도들의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판에 대해 기록된 말씀 중간 중간에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 하나님께서는 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성도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입니다. 5장에도 6장에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기도를 듣고 계심이 자세히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에 귀 기울이십니다. 성도가 어려운 말세의 시간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기도라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성도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우리를 채우시고 양육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화할 수 있는 너로 지으셔서 그들과 교제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묵상하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면 그 음성을 듣고 우리의 마음과 소망을 아뢰는 것이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기도는 그들을 지탱해 주는 중요한 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군가에게 내 고난과 어려움을 호소할 수 있고 그 어려움이 해결될 것이라는 소망은 성도로 하여금 절망하지 않고 고난의 터널을 지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기도가 응답되고 있다는 확신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따르는 새로운 기쁨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성도들의 기도의 향연이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세세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늘의 찬양대인 네 생물과 천사들과 이십 사 장로들의 찬양조차 멈추고 있는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간을 위해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은 하늘의 모든 합창보다도 성도들의 간절한 소원이 담긴 기도의 향연을 들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처럼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는 하늘의 제단 위의 향기로운 제물이 될 것이고 또한 역사를 바꾸는 큰 힘이 되어 질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면 기도는 더 이상 종교적이 의무 혹은 무거운 신앙적인 짐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며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는 무의미한 말들의 나열이나 귀신들에게 드렸던 치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생생한 언어요, 지금 향연과 함께 하늘 보좌에 상달되고 있는 실시간 대화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특별히 10-11절의 말씀 중에서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라고 기록한 말씀을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11절 말씀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라는 말씀으로 심판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라는 말씀을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해석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문자적 해석이고 둘째는 영적인 해석입니다. , 이 재앙은 자연계에 내려지는 재앙인 동시에 그 상징의 표현들을 통하여 마지막 대 환난 때에 극심하게 일어날 배도하는 사건들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0의 말씀을 보면 별은 주의 사자로 기록되고 있는데 이는 주의 종을 의미합니다. 이 주의 종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배도의 무리로 돌아섰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지막 때는 거짓 선지자를 통해서 미혹되어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때는 말씀에 입각한 선지자, 하나님의 일을 성실과 정직으로 감당하는 선지자를 만나는 것이 그 어떤 복보다 큰 복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마지막 때에는 영적분별의 은사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어떻게 상달되는가를 보게 됩니다. 5:8절에서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찬양과 기도가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때 성도들의 기도를 향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6:9절 이하에는 순교자들이 하늘의 제단 아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또 다시 좀 더 강조된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반시간의 침묵을 보여주시며 성도들의 기도를 귀 기울여 들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기도하기를 시작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고 우리 인생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사실 앞에서 겸손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인내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되 로마의 권세가 영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영원하지 않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지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히 있습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실 때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재앙들은 마지막 심판에 대한 예표들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팔 재앙들을 통해서 출애굽기에 주셨던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듣기를 원합니다. 나날이 후패해져 가는 우리의 육체를 보면서 이 땅이 영원할 것처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회개하고 깨어 근신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드려지시기 바랍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모든 가치를 두지 마십시다. 하늘소망으로 삶을 다시 채우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셔서 수고 하고 무거운 짐 진 것들로부터 자유 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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