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요한계시록강해-10 / 회개의 중요성

▷ 본문 :요한계시록 9장 1절 - 21절
▷ 설교자 :전근일 담임목사
▷ 설교일 :2013년 2월 17일 주일

지난 주 우리는 일곱째 인을 떼자 시작된 일곱 나팔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의 나팔로 인한 심판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지 않고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지에 대해서만 다루었습니다. 이유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요한계시록 9장의 말씀에 나머지 세 가지 심판이 더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면 지난주 본문이었던 8장에서 일곱 나팔의 심판이 시작되는데 특별히 7절부터 일곱 나팔의 심판이 시작이 됩니다.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졌고 이로 인해서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를 풀도 타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마치 출애굽기에 나온 10가지 재앙 중 우박재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나팔의 심판은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로 변하는 재앙으로 이로 인해 바다의 생명 3분의 1일 죽고 배들이 깨진다고 했습니다. 이 심판은 출애굽기에 나온 10가지 재앙 중 첫 번째 재앙이 물이 피가 되어 하수에서 악취가 나는 재앙과 닮았습니다.

세 번째 나팔을 불자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 샘에 떨어져서 물을 마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시 첫 번째 심판으로 물을 마시지 못하게 된 상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별의 이름은 쓴 쑥입니다. 물의 삼분의 일이 쓰게 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네 번째 나팔에서 해와 달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는 것은 흑암 재앙을 연상하게 합니다. 원래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세웠던 질서들이었습니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할 때 하나님은 공허한 우주에 채움의 창조를 무질서한 우주에 질서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질서가 깨지고 채웠던 것들이 다시 파괴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애굽에 내렸던 열 재앙은 바로를 회개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섬기는 신들의 가치 없음과 하나님이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신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애굽의 신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에 대해서 아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죽은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열 재앙은 이 세상의 신들을 섬기는 것의 헛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피조물들은 섬길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나팔 재앙은 애굽의 바로의 강퍅함처럼 좀처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또한 뒤로 가면 심판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은 제외되고 애굽에만 심판이 있게 됩니다. 나팔 재앙의 대상은 하나님의 인 맞은 백성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8장에 기록된 처음 네 개의 나팔 심판은 인간에 대한 심판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삶을 지탱해 주는 피조물들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세 개의 경우는 인간을 향하여 심판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참한 심판의 내용이 계 9:1-11절에 황충의 재앙으로 나타납니다. 황충은 메뚜기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의 배경이 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메뚜기는 가장 무서운 재앙가운데 하나였다고 합니다. 수백만 마리의 메뚜기들이 봄부터 여름까지 5개월의 건기 동안에 사막에서 갑자기 날아와 모든 식물을 먹어치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9장에 언급된 황충, 곧 메뚜기는 땅의 전갈의 권세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메뚜기들은 자신의 습성을 따라서 곡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않은 사람을 공격하는 일을 합니다.

저는 어려서 지내에게 물린적이 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내에 대해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내보다 더 강력한 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전갈입니다. 전갈도 종류에 따라서 독의 등급이 있다고 합니다. 자이언트 데스 스토커라는 종은 독에 쏘일 경우 2시간 이내에 사망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블랙 팁테일 전갈이라는 종은 3등급의 독을 가지고 있는데 쏘이면 24시간에서 72시간 정도를 심각한 고통에 떨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통으로 인해서 계 9:6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심판은 계 9:12-21절에 언급된 2억의 마병들입니다. 이들은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해서 준비된 자들입니다. 60억 인구의 3분의 1이면 20억입니다. 20억이 일시에 죽는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2억의 마병들은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곳곳에서 천천이나 만만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수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7절 말씀에 호심경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슴과 몸통 전체를 보호하는 장비를 지칭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 준비된 마병이 입은 갑옷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불과 연기와 유황입니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19장에 기록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계 9:19꼬리는 뱀 같고 또 고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는 말씀을 보면 다섯 번째 심판의 모습에 언급된 전갈과 비슷하게 찌르는 것으로 그 모습이 뱀과 같다는 것은 사탄적인 성질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극심한 고통의 심판 가운데서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회개의 대상은 누구일까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회개의 대상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국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회개를 회심의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고 우리가 범한 죄악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사건, 즉 자복의 사건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회개의 범위는 꼭 세상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씀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회개라는 말을 찾아보면 교회를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하시고 요한계시록 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말씀하시고 요한계시록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모든 말씀은 교회를 향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환경에 노출됩니다. 믿음의 역사가 넘치는 환경 가운데 살 수 있고 때론 죄악의 역사가 넘치는 환경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에는 죄악의 역사에 영향을 받아 죄악을 짓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죄악을 돌이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첫사랑을 잊어버린 것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죄악된 행실에 대해서 그리고 신앙적인 열심을 잊어버린 것에 대해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회개의 중요성을 다시금 회복해야 합니다. 제가 주일학교를 다니던 70년대 말 80년대 초에 저를 지도하셨던 많은 선생님들이 늘상 강조하던 말씀은 회개였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도 회개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도 내가 일주일 동안 지었던 죄를 생각해보며 회개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를 다니면서 새벽에 3시간 이상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도록 인도하심을 구하였고 밤 12시만 되면 기도굴에 가서 하루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회개기도를 드렸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90년대 그리고 2000년도를 넘어서 오늘에 이르기면서 회개라는 말씀은 그저 부흥회 때나 간혹 듣던 말씀이었고 최근의 부흥회에서는 회개라는 말 보다는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사랑, 승리하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허다해졌습니다. 저 자신도 철저하게 하나님께 회개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최근에 일고 있는 구원 받은 사람도 버림을 받을 수 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회개와 믿음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선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가운데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에 대해서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근거나 권리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아시고 그리고 그 일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에 있어 구원 받은 사람도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전성 확은 그 능력을 폄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의 죄보다 더 강하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범하면 다시금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은 성경적으로 볼 때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사람이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이야기 할 때 그 사람이 과연 예수님을 진정으로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믿음은 생활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가르켜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믿는 것을 삶을 통해서 증명하는 것입니다. 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는 말씀을 근거로 할 때 믿는 다고 이야기 하면서 행하지 않는 사람과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행하는 사람을 비교할 때 과연 누가 믿는 사람이겠습니까? 행하는 사람입니다. 행한다는 것 안에는 믿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히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회개의 대상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9:4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지는 말도록 경계하십니다. 그것은 왜입니까? 바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이유는 21절 말씀에 회개하지 아니하더라는 말씀을 통해서 확고해집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길 원하십니다. 마치 자신의 품이 싫고 자유를 찾아 떠났던 탕자를 기다리던 아버지의 마음처럼 탕자와 같은 세상 사람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그 징계의 목적은 영원한 사망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계 9: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는 말씀처럼 그들이 그 모든 고통의 시간을 지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만드신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만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 피를 통해 구원하길 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이켜 회개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813절에 독수리가 세 가지 심판이 임하였음을 예젼하는 장면에서 화, , 화라고 말씀한 것은 헬라어로 오우아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감탄사로서 심판의 선언이 아니라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의 비참한 형편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해서 그리고 복음을 거부하고 그리고 복음을 듣지 못하고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회개의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극적으로 표현된 말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 심판을 유보하시고 우리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시는 것이기에 회개는 축복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적극적인 그리고 길이참고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회개도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때가 되면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심판하실 예수님이 이 땅에 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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