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거룩한 신부된 교회

▷ 본문 :요한계시록 19장 1절 - 21절
▷ 설교자 :전근일 담임목사
▷ 설교일 :2013년 7월 14일 주일


우리는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일컫는 음녀 바벨론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바벨론의 심판은 정해진 것이고 속히 이루어질 일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세상을 본받지 말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음녀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난 후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191절의 말씀은 이 일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즉 음녀 바벨론이 심판을 받고 난 후라는 사실을 다시금 알려주는 말씀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늘의 천군 천사가 모여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찬양의 내용을 보면 1절에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는 것이고 6절에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번역되지 않은 히브리어입니다. 그래서 할렐루야는 어떤 사람이 이야기해도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는 찬양하라할랄에 해당하는 야훼 하나님을 의미하는 의 합성어입니다. 즉 할렐루야는 너의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로 일상생활 가운데 어떤 확신이 들고 감격이 들어 하나님을 높이고 싶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때 총 네 번의 할렐루야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각기 다릅니다. 첫 번째 사용된 할렐루야는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한고 감격하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사용된 할렐루야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심을 감격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사용된 할렐루야는 조금 차이가 있는데 바로 할렐루야 앞에 아멘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아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렇게 될 것을 믿습니다.’라는 의미로 보좌에 앉으신 권능의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사용된 할렐루야는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찬양의 노래 가운데 조금은 놀라운 것은 바로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1절부터 6절까지 기록된 찬양의 내용이 7절 곧 어린 양의 혼인 기약에 집중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어떠한 고난과 시험가운데서도 신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핍박하던 음녀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이고 세세토록 통치하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위해서 혼인 잔치를 준비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포함된 내용 말고도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를 비유로 들어 마지막 때 일어날 일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불을 준비하는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오는데 오늘의 본문과 흡사한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혼인잔치 예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결혼식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이 됩니다. 먼저 유대 청년들은 1년에 일곱 번의 절기 축제 때 서로 호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신랑은 부모에게 통보하고 자기가 점찍은 신부의 집으로 자기를 가장 잘 변호해 줄 수 있는 친척 중 한 사람을 대동하고 갑니다. 그리고 세 가지를 준비해서 가는데 첫째, 포도주 한 잔을 담을 수 있는 가죽부대 하나와 둘째, 신부의 지참금과 셋째, 서약서입니다.

이것을 준비한 신랑이 신부 집에 도착할 때 신부는 모습을 보이면 안됩니다. 신랑은 신부 아버지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소개를 하는데 주로 자신의 지파와 족보를 자세히 이야기 하고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정확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나면 신부의 지참금과 관련된 내용을 서로 논의하고 몇 가지의 질문을 더 하고 결혼을 허락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신랑은 신부의 아버지와 신부 앞에서 서약서를 낭독합니다. 그리고 가지고 간 포도주를 잔에다 따라서 반잔을 신부에게 줍니다. 그리고 신부는 그것을 마시고 두 세 방울을 서약서 위에다 떨어뜨립니다. 이것은 이 결혼서약이 피로서 맺어진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를 청혼이라고 합니다. 청혼은 법적인 효력이 있어서 아직 합방을 하지 못했지만 정식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청혼이 끝나면 신랑은 신부에게 지금으로부터 약 1년 뒤 알지 못하는 어느 날 저녁에 나는 당신을 데리러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준비하고 기다리십시오.’라고 이야기 하고 떠납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날짜는 이야기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날짜는 오직 신랑 아버지가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년 동안 신랑 신부는 각자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합니다. 신부는 신랑의 집안 가풍과 음식 및 생활 습관이 어떤지를 배우고 익힙니다. 반대로 신랑은 돌아와 신부와 함께 살 집을 짓습니다. 신랑이 집을 짓는 모든 과정을 신랑의 아버지가 지켜봅니다. 1년쯤 되어서 집이 어느 정도 지어졌다 싶고 아들이 심성적으로 그리고 생활태도가 준비되었다 생각될 때 신랑 아버지가 신부를 데려올 것을 명령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신랑도 그 날과 그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부를 데리러갈 때 큰 소리를 외치며 마을에 진입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동안 최선을 다해 준비한 신부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단장을 하고 준비합니다. 혹 신랑이 저녁에 도착할 경우를 위해서 등불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혼인잔치를 진행할 때 어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청혼을 통해서 형성된 약혼입니다. 유대인들 사회에서 약혼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약혼보다 훨씬 구속력이 강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죽음이나 이혼을 통해서만 끊어질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기간이 오늘날 교회가 광야에 있는 기간입니다. 그러니까 약혼을 하고 결혼을 기다리는 기간이 유대인의 전통에는 1년 정도인데 요한계시록에서는 1260, 혹은 한 때 두 때, 반 때, 혹은 마흔 두 달의 기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혼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부가 준비되었느냐는 것입니다. 혼인 기약이 이르렀는데 신부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혼인이 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7절을 보면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신부가 약혼과 결혼의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하였고 아내로서 손색이 없이 준비가 되었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럴 때 신부는 비로소 예복을 입을 수 있게 됩니다. 8절을 보면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라고 기록한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예복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옳은 행실이 없는 신부는 혼인 잔치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이르기까지 이 땅의 교회, 즉 거룩한 신부로서의 교회는 아내로서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준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도로서 옳은 행실입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신앙입니다.

9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혼인잔치에 대해서 비유한 또 다른 말씀과 연결되는 부분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2장에는 혼인잔치를 준비한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혼인잔치를 위해서 사람들을 초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밭에 가서 일을 해야 하고 혹은 자신들의 사업을 위해서 초청을 거부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임금의 명령을 받고 사람들을 초청한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종들에게 길에 나가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청하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임금이 혼인잔치에 참여했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게 어찌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잔치에 참여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를 바깥 어두운 곳에 내던져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2214절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9절을 보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신부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혼인 잔치의 주인공들입니다. 비록 신랑이 언제 올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복을 준비하며 그리고 신랑이 오는 날을 환하게 비출 수 있는 등불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45절은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또다시 하늘이 열리며 그곳에서 백마와 그것을 탄자가 나타나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말씀을 계속 읽어나가면 백마탄자가 예수님임을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배웠던 요한계시록 6장에 나온 흰말을 탄자와는 구별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6장에 나온 흰말탄자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62절에 기록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는 말씀이 완전한 승리를 이루신 예수님과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백마를 탄 예수님은 15절의 말씀에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는분이십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25절에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라는 말씀과 대등한 말씀으로 예수님의 강력한 능력과 확고한 심판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 예수님은 그렇게 말해도 듣지 않고 견고히 자신의 성을 쌓던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서 철저하게 공의로 심판하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예수님을 향해 16절에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고 예수님의 신적인 위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사람들을 위해서는 신랑으로 임하실 것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음녀 바벨론과 함께한 사람들을 향해서는 심판주로 임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의 모습은 17-18절의 말씀을 보면 한 천사가 공중의 새에게 외쳐서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들의 살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9-20의 말씀을 보면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들도 함께 잡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산 채로 유황불에 던지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를 보면 처녀들이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신랑이 왔다는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됩니다. 그때에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불을 밝힐 기름을 준비하였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여 기름을 준비하러 간 사이에 혼인 잔치의 문이 닫히게 됩니다. 그 후에 부랴부랴 기름을 준비하러 간 처녀들이 와서 문을 두드렸을 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대답만 문 저쪽 넘어에서 들릴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생각지 못할 때에 이 땅에 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 날을 위해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날은 결코 그 날이 도둑이 임하는 것처럼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고 데살로니가전서 54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의 거룩한 신부임을 잊지 말고 언제나 설렘을 가지고 신랑되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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